성황신, 신앙의 유래
성황신, 신앙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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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황신으로 불리는 토지신에 대한 신앙이 생겨난 것은 1세기 무렵으로 추정된다.
239년에 오나라의 초대 황제 손권(孫權)1)이 안휘성의 무호(蕪湖)에 사당을 건립한 것이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그후 전쟁과 재해, 전염병 등이 발생할 때마다 각지에서 토지신에 대한 제사를 드렸다.
명나라 태조(太祖, 1328~1398)는 도(都, 수도)의 성황신을 필두로 부, 주, 현 순으로 공식적인 토지신의 서열을 정해주었다고 한다.
?토지신에 임명되려면 그 지역에 연고가 있고, 생전에 무언가 공적이 있어야 했다.
따라서 각 지역을 관할하는 토지신의 실체는 제각기 달랐으며, 지상의 지방장관처럼 승진이나 전임, 좌천도 있었다.
이러한 배치는 옥황상제나 그 밑의 관제(關帝)가 맡았다고 한다.
생전에 제대로 승진하지 못했던 인물이라 할지라도 죽은 후에 관료가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성황신(城隍神)을 모시는 당우(堂宇)로 성황사(城隍祠), 성황신묘(城隍神廟), 성황신사(城隍神祠) 등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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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 서낭신앙이 전래된 것은 고려 문종 때 신성진(新城鎭)에 성황사(城隍祠)를 둔 것이 서낭의 시초라 한다.
그 뒤 고려에서는 각 주부현(州府縣)마다 서낭을 두고 이를 극진히 위하였는데, 특히 전주서낭이 유명하였다.
고려 고종은 침입한 몽고병을 물리치게 된 것이 서낭신의 도움 때문이라 하여 서낭신에게 신호를 가봉하였던 일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수호신으로서의 서낭은 조선시대도 널리 신앙되었다.
조선시대의 서낭은 국행(國行)서낭과 민간에서의 서낭으로 나뉜다. 국행서낭은 호국(護國)이라는 두 글자를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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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李成桂, 조선 태조)는 즉위 후 여러 산천의 서낭을 제사하였으며,
태종은 백악(白岳, 한양 북악산(北岳山)의 옛 지명)서낭과 송악(松岳, 개성 송악산)서낭을 국가에서 지정한 신도(新都)서낭으로 모셨다.
그 밖의 조선시대의 이름난 서낭으로는 해주·괴산·현풍·양산·신성(新城)·밀양·전주·고성 서낭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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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서낭에서는 정기적인 제사뿐만 아니라, 국난이나 가뭄이 있을 때 서낭제를 거행하여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하려 하였다.
서낭당의 형태는 크게 몇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서낭나무에 잡석을 난적(亂積)한 누석단이 있고,
이 신수에 백지나 청·홍·백·황·녹색 등의 오색 비단 헝겊을 잡아맨 형태, 잡석을 난적한 누석단 형태,
서낭나무에 백지나 5색 비단 헝겊 조각을 잡아맨 형태,
서낭나무와 당집이 함께 있는 형태, 입석(立石) 형태 등이 있다.
출처-천 부 삼 인 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