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님거리

장군님거리

비룡 0 2157

장군님거리

?장군님거리

 

일명 ‘대(大) 거리’ 또는 ‘상산거리’ 혹은 ‘마누라 거리’라고도 하며,

두 개를 합쳐서 ‘상산 마누라 거리’라고도 한다.

??구파 발본 문서를 계승한 분들은 ‘최영 장군’ 또는 ‘덕물산 마누라(최영 장군을 뜻함)’라고 호명하기도 한다.

장군님 거리는 많은 이름이 존재하지만 대다수 최영 장군님을 뜻하고 있는데 장군님 거리를

최영 장군님 거리로 만 국한하여 호칭하는 것은 너무 편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장군님 거리는 공수나 제목을 보면 혼돈되는 단어가 있어 소개할까 한다.

 

‘상산’이란 단어를 ‘덕물산에 최영 장군님이 계셔서 상산(上山)이라’, 즉 ‘높은 산’이라고 학습하였다.

그런데 조흥윤 교수가 집필한 『한국의 샤머니즘』 이란 책에 보면 ‘상산은 덕물산 위에 있는 작은 마을의 지명’으로 설명되어 있다.

또한 ‘마누라’란 단어가 있다.

일반적 상식으로는 중년이 넘은 아내를 가리키는 단어지만 굿에서 사용하는 ‘마누라’란 단어는 황해도 지방 방언으로 ‘마마’란 뜻이다.

 

위의 내용을 보면 한양굿이 개성 굿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한양굿의 뿌리를 찾아 역행하여 올라가면 개성 굿이 기초가 되어 만들어졌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조선이 건국하기 이 전에 고려의 개성이 수도였으며,

?그 시절 개성은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중요한 도시였고 무교 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도시였을 것은 자명 한 사실이다.

 

그러다가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면서 수도를 한양으로 천도하여 많은 백성들이 한양으로 이사를 해야 했을 것이다.

물론 무교의 사제도 신도들을 따라 신당을 한양으로 이전하여 무업을 이어가야 했을 것이다.

이렇게 한양으로 이전하면서 개성에 있는 기존 신도들을 관리하고

한양으로 이사한 새로운 신도들을 구성하기 위해서 가장 적합한 장소가 필요했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의 ‘구파발’이다.

구파발은 개성과 한양의 중간 지점이며 개성에서 한양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있는 장소이다.

계자들이 한양으로 이전하며 처음으로 무교촌을 형성한 곳 또한 지금의 구파발이다.

그래서 한양굿 문서 중 구파 발본 문서를 큰집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신도들이 어민이 많았던 계자들은 육로가 아닌 뱃길을 따라 한양으로 입성했을 것이다.

입성 과정을 보면 바로 한양으로 들어오지 않고 강화도를 통해 인천으로 들어와 정착하였다.

(그런 까닭에서인지 지금도 인천 지방은 한양 굿하는 사람보다 이북 굿을 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그렇게 인천에서 정착하다 한양으로 들어와 자리 잡은 곳이 바로‘노들변’마포 나루터 건너편이다.

그래서 구파발 무가가 큰집으로, 노들본 무가가 작은집으로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조선 사회가 안정과 발전을 하면서 외곽에 있던 계자들이 한양 성내로 들어와 정착하여

무업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정부로부터 성내에서 퇴출되거나 철퇴를 맞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이들 중 일부는 구파발 본가로 귀향하고, 노들변 본가로 회환하는 계자도 있지만,

성내에서 가까운 동대문 밖 ‘각심절’ 근처에서 새로운 무교촌을 형성하게 되었는데,

이로써 각심절이 마지막으로 한양굿의 본가로 형성되는 것이다.

 

현존하는 한양굿과 이북 굿의 가장 큰 차이점은 작두거리이다.

한양굿은 별상님이 작두에 오르고, 이북 굿은 장군님이 작두를 탄다.

한양굿은 작두를 타지 않고 사슬만 세운다.

?

왜 한양굿과 이북 굿에서 다른 신령님이 작두를 타는지는 다음에 나오는 별상님 거리에서 상세히 설명하도록 하자.

장군님 신복은 우선 백치마를 속치마로 입고, 그 위에 남홍색 대란치마를 입고,

상의는 남철릭을 입고, 머리에는 큰머리를 올리고, 그 위에 주립(朱笠) 호수를 꼽아 장식하여 쓰고,

오른손에 월두검을  왼손에 삼지창을 들고 거성하여 공수를 준다.

장군님 제단은 오른쪽에 차리고 통 갈비를 받치는데,

갈비 위에 파, 홍실 고추, 계란지단(흰자, 노른자 따로), 석이버섯 채로 고명을 올리고

우족 한 쌍, 산적, 양지머리, 약주 등을 올린다.

 

출처- 천부삼인 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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