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무속나라 밴드 (2023-12-15)
성수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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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5 13:05
#27일차 #옥황상제딸 #굿당/기도터 #연당각시 #연화각시
연당각시제단
경남 창녕군 성산면 연당길 35
경남 창녕군 성산면 연당리 355-1
(제 사진상 주소는 위 주소로 나옵니다.)
연당각시제단
고려시대때의 전설이서려있는 이곳은
천황천존님의아들
천존대왕
옥황상제께서 옥황의딸을 책망하여
지상으로 귀양 보내게 되었다 합니다
슬픔을 안은채 무지개다리를 타고 내려온 곳이
수봉산 계곡의 폭포가 쏟아지는 반석 위였는데
그래서 이곳을 ..지금도 무지개도랑이라고 부른다 해요
옥황의딸은 울창한 숲을헤쳐
인가를찾아 계곡을오르고 멀지 않는곳에서
서너채의 초가를 발견하고 찾아들었는데
그곳이 지금의 구연화 였다고 합니다.
옥황의딸은 다시 여기서 등 너머의 큰 마을인 연당으로
오셔서 남의 일을도우며 밥을 얻어먹고 지내게 되었고
모두들 연화에서 넘어온 색시라하여
연화각시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전설을 옮겨보면
성산면 연당리 앞산 양지 바른 산중턱에는 "연당각씨"라고 불리우는 무덤 하나가 오늘도 무성한 잡초에 묻혀 있다.
일명 "연화각씨"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 "연당각씨"에 얽혀 있는 기맥힌 전설은.
옛날, 아주 옛날의 일이었다. 어느날 낯선 여인 한사람이 우연히 연당리 부락에 나타나서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걸식을 하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 여인의 옷차림이나 말씨등이 보통 걸인과는 달라 항상 따뜻하게 대해 주며 "연당각씨"라고 일름을 지어 불렀다.
세월은 흘러 "연당각씨"가 연당리에서 이집 저집 돌아다니면서 걸식을 하기 시작 한지 3년이 되는 어느 따뜻한 봄날이었다.
"연당각씨"는 마을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는, 내가 마을에 들어 온지 벌써 3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하고 말 머리를 꺼내더니,
그 동안 나를 한 식구처럼 따뜻하게 대해 준데 대해서 정말 고맙게 생각합니다. 하면서 눈물을 비오듯이 흘리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아니 ! 연당각씨 갑자기 웬일이요?」
「왜 그러시요?」하면서, 깜짝 놀랐다.
"연당각씨" 는 한참만에,
「나는 이제 이 마을을 떠나야 할 때가 되었으니 내가 이 마을에 3년 동안 살았다는 기념으로 조그마한 움막집 한 채를 지어 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하면서, 간청을 하는 것이었다.
「뭣이! 움막집을 지어 달라고-」
마을 사람들은 "연당각씨"의 간곡한 원에 못 이겨 곧 조그만한 움막집을 한 채 지어 주기로 했다.
그러자 "연당각씨"는 마을 앞 높은 산을 가르키며,
「저 산마루에다 지어 주세요. 네.」하면서 기뻐 어쩔 줄을 모르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곧 힘을 합하여 그가 원하는 양지 바른 산마루에다 조그만한 움막집 한 채를 지어 주었다.
집이 완성되자 이번에는
「쌀 한말과 그외 식기를 이 집에 넣어 주십시요.」하며, "연당각씨"가 머리를 조이리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연당각씨"의 소원데로 쌀과 식기를 움막집안에 넣어 주었다.
그로 부터 며칠 후 "연당각씨"는
「내가 움막집에 들어 가고 난 다음에는 커다란 바위로 출입구를 꼭 막아 주시고, 그리고 언제든지 쌀물이 흘러 나오거든 내가 살아 있는 줄로 알고 핏물이 흘러 내리거든 죽은 줄로 아십시요.」
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숙연해 졌다.
그리고 한참만에 "연당각시"는 그가 입고 있던 치마 한폭을 끊어주면서,
"오랫동안 이 마을에서 신세를 끼친 보답으로 이 베를 드립니다. 몇년 후에 이 근처에 큰 공사가 있을 것인데 그때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며, 마을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둥거리며 "연당각시"가 시키는데로 커다란 바위로 움막집 입구를 단단히 막아 주었다.
"연당각씨"가 움막집으로 들어 가 버린지 몇개월이 지난 뒤였다.
마을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움막집에서 검붉은 핏물이 흘러 나와 개울물을 적셨기 때문이다.
「연당각씨」가 죽었다.
「----------.」
마을 사람들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몰려 나와 나와 너도 나도 눈물을 흘리며 " 연당각씨"의 죽음을 슬퍼 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1년에 한번씩 제사를 지내 주기로 하였던 것이다.
"연당각씨" 가 죽고 난 다음 3년째 되는 해였다.
나라(고려)에서는 이 근처에 큰 절을 짓게 되었다.
그런데 국령으로 촌민들이 부역을 하던 중 절의 대들보로 쓰일 나무를 옮기게 되었는데 어쩐 일인지 수십명의 인부들이 동원되어도 끄떡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허허. 이것 참 큰일 났군.」
「아니! 대관절 어떻게 된 일이냐?」
사람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하며 어찌 할바를 몰라 했다.
그때였다.
「가만 있자. 좋은 수가 있다.」
누군가가 산이 쨍하게 울리게스리 소리 치며 달려 가더니만 3년전 "연당각씨"가 두고간 베조각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베조각을 그 커다란 나무 위에 걸쳐 놓고, "자-. 여러분! 이제는 쉽게 옮길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다 같이-."하며, 소리쳤다.
그런데 이때 까지 바위처럼 끄떡도 하지 않던 나무가 종이장처럼 쉽게 움직여 지지 않은가?
"와-----------."
사람들은 탄성을 발 하였다.
이렇게 하여 쉽게 크다란 절을 짓게 되었으나 훗날 그 절은 언제 어느때 어떻게 해서 없어 져 버렸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절터만은 아직도 뚜렷이 남아 있다.
(이 절이 속칭 팔방구암자의 대본산이라고 전해 짐.)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연당각씨"가 두고 간 치마 폭으로 당기(마을기)를 만들어 오래오래 정중히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연당각씨"에 대한 추모의 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음은 말 할 필요조차 없거니와 멀리 타처에서 까지 "연당각씨"의 묘를 찾아 오는 부인네들이 수 없이 많다고 한다.
무성한 잡초에 묻혀 흐르는 세월과 함께 허물어 져 가고 있는 "연당각씨"를 추모하며 아들 낳고 딸 낳아 행복하게 살아 가고 있음을 크게 자랑으로 삼는다.
아래는 연당각시제단 인사 올리고 찾았던 근처 서낭
연당리228








연당각시제단
경남 창녕군 성산면 연당길 35
경남 창녕군 성산면 연당리 355-1
(제 사진상 주소는 위 주소로 나옵니다.)
연당각시제단
고려시대때의 전설이서려있는 이곳은
천황천존님의아들
천존대왕
옥황상제께서 옥황의딸을 책망하여
지상으로 귀양 보내게 되었다 합니다
슬픔을 안은채 무지개다리를 타고 내려온 곳이
수봉산 계곡의 폭포가 쏟아지는 반석 위였는데
그래서 이곳을 ..지금도 무지개도랑이라고 부른다 해요
옥황의딸은 울창한 숲을헤쳐
인가를찾아 계곡을오르고 멀지 않는곳에서
서너채의 초가를 발견하고 찾아들었는데
그곳이 지금의 구연화 였다고 합니다.
옥황의딸은 다시 여기서 등 너머의 큰 마을인 연당으로
오셔서 남의 일을도우며 밥을 얻어먹고 지내게 되었고
모두들 연화에서 넘어온 색시라하여
연화각시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전설을 옮겨보면
성산면 연당리 앞산 양지 바른 산중턱에는 "연당각씨"라고 불리우는 무덤 하나가 오늘도 무성한 잡초에 묻혀 있다.
일명 "연화각씨"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 "연당각씨"에 얽혀 있는 기맥힌 전설은.
옛날, 아주 옛날의 일이었다. 어느날 낯선 여인 한사람이 우연히 연당리 부락에 나타나서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걸식을 하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 여인의 옷차림이나 말씨등이 보통 걸인과는 달라 항상 따뜻하게 대해 주며 "연당각씨"라고 일름을 지어 불렀다.
세월은 흘러 "연당각씨"가 연당리에서 이집 저집 돌아다니면서 걸식을 하기 시작 한지 3년이 되는 어느 따뜻한 봄날이었다.
"연당각씨"는 마을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는, 내가 마을에 들어 온지 벌써 3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하고 말 머리를 꺼내더니,
그 동안 나를 한 식구처럼 따뜻하게 대해 준데 대해서 정말 고맙게 생각합니다. 하면서 눈물을 비오듯이 흘리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아니 ! 연당각씨 갑자기 웬일이요?」
「왜 그러시요?」하면서, 깜짝 놀랐다.
"연당각씨" 는 한참만에,
「나는 이제 이 마을을 떠나야 할 때가 되었으니 내가 이 마을에 3년 동안 살았다는 기념으로 조그마한 움막집 한 채를 지어 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하면서, 간청을 하는 것이었다.
「뭣이! 움막집을 지어 달라고-」
마을 사람들은 "연당각씨"의 간곡한 원에 못 이겨 곧 조그만한 움막집을 한 채 지어 주기로 했다.
그러자 "연당각씨"는 마을 앞 높은 산을 가르키며,
「저 산마루에다 지어 주세요. 네.」하면서 기뻐 어쩔 줄을 모르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곧 힘을 합하여 그가 원하는 양지 바른 산마루에다 조그만한 움막집 한 채를 지어 주었다.
집이 완성되자 이번에는
「쌀 한말과 그외 식기를 이 집에 넣어 주십시요.」하며, "연당각씨"가 머리를 조이리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연당각씨"의 소원데로 쌀과 식기를 움막집안에 넣어 주었다.
그로 부터 며칠 후 "연당각씨"는
「내가 움막집에 들어 가고 난 다음에는 커다란 바위로 출입구를 꼭 막아 주시고, 그리고 언제든지 쌀물이 흘러 나오거든 내가 살아 있는 줄로 알고 핏물이 흘러 내리거든 죽은 줄로 아십시요.」
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숙연해 졌다.
그리고 한참만에 "연당각시"는 그가 입고 있던 치마 한폭을 끊어주면서,
"오랫동안 이 마을에서 신세를 끼친 보답으로 이 베를 드립니다. 몇년 후에 이 근처에 큰 공사가 있을 것인데 그때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며, 마을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둥거리며 "연당각시"가 시키는데로 커다란 바위로 움막집 입구를 단단히 막아 주었다.
"연당각씨"가 움막집으로 들어 가 버린지 몇개월이 지난 뒤였다.
마을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움막집에서 검붉은 핏물이 흘러 나와 개울물을 적셨기 때문이다.
「연당각씨」가 죽었다.
「----------.」
마을 사람들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몰려 나와 나와 너도 나도 눈물을 흘리며 " 연당각씨"의 죽음을 슬퍼 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1년에 한번씩 제사를 지내 주기로 하였던 것이다.
"연당각씨" 가 죽고 난 다음 3년째 되는 해였다.
나라(고려)에서는 이 근처에 큰 절을 짓게 되었다.
그런데 국령으로 촌민들이 부역을 하던 중 절의 대들보로 쓰일 나무를 옮기게 되었는데 어쩐 일인지 수십명의 인부들이 동원되어도 끄떡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허허. 이것 참 큰일 났군.」
「아니! 대관절 어떻게 된 일이냐?」
사람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하며 어찌 할바를 몰라 했다.
그때였다.
「가만 있자. 좋은 수가 있다.」
누군가가 산이 쨍하게 울리게스리 소리 치며 달려 가더니만 3년전 "연당각씨"가 두고간 베조각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베조각을 그 커다란 나무 위에 걸쳐 놓고, "자-. 여러분! 이제는 쉽게 옮길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다 같이-."하며, 소리쳤다.
그런데 이때 까지 바위처럼 끄떡도 하지 않던 나무가 종이장처럼 쉽게 움직여 지지 않은가?
"와-----------."
사람들은 탄성을 발 하였다.
이렇게 하여 쉽게 크다란 절을 짓게 되었으나 훗날 그 절은 언제 어느때 어떻게 해서 없어 져 버렸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절터만은 아직도 뚜렷이 남아 있다.
(이 절이 속칭 팔방구암자의 대본산이라고 전해 짐.)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연당각씨"가 두고 간 치마 폭으로 당기(마을기)를 만들어 오래오래 정중히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연당각씨"에 대한 추모의 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음은 말 할 필요조차 없거니와 멀리 타처에서 까지 "연당각씨"의 묘를 찾아 오는 부인네들이 수 없이 많다고 한다.
무성한 잡초에 묻혀 흐르는 세월과 함께 허물어 져 가고 있는 "연당각씨"를 추모하며 아들 낳고 딸 낳아 행복하게 살아 가고 있음을 크게 자랑으로 삼는다.
아래는 연당각시제단 인사 올리고 찾았던 근처 서낭
연당리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