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무속나라 밴드 (2023-12-13)
성수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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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3 10:25
#초하루 #초하루공부 #공즉시색 #곳곳이부처님
#금강경 #신문에서옮김
음력 23년11월01일 초하루 생각하는 글 옮김.
처처불상은 교리 4대표어의 맨 첫머리에 있는
원불교의 대표적인 가르침입니다.
이 중요한 가르침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공부1)
태조 이성계가 어느 날 무학대사에게 농(弄)을 걸었습니다.
“오늘 보니 대사는 짐의 눈에 살찐 돼지 같소이다.”
“소승의 눈에 대왕께서는 부처님 같습니다.”
“나는 대사를 돼지라고 하는데 왜 대사는 나에게 부처라 하시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이는 법이지요.”
대종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천지 만물 허공 법계가 다 부처 아님이 없나니,
우리는 어느 때 어느 곳이든지 항상 경외심을 놓지 말고
존엄하신 부처님을 대하는 청정한 마음과 경건한 태도로
천만 사물에 응할 것이며.” (교의품 4장)
이렇듯 우주만유가 다 법신불의
응화신(應化身: 세상에 몸을 나툰 것)이니,
일체가 부처 아님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대상을 참다운 부처님으로 대한다면,
우주만유와 내가 둘 아닌 몸,
상생(相生)의 관계로 되살아나서,
만나는 인연마다 행동 하나하나
끝없는 복으로 화하여 이 세상은 한없는 불토낙지(佛土樂地)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묻습니다.
“저도 마음으로는 모든 대상을 부처님으로 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 눈으로 보면 부처로 보이지가 않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공부2)
위 질문은 많은 이들의 공통된 의문입니다.
일체 모든 것이 부처라는 가르침을 믿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현실을 대하면 실제로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곧 마음에 상(相)을 가진 채로 보기 때문입니다.
부처로 보겠다는 것은 이른바 ‘부처’라고 하는 개념[相]을
미리 설정해놓고, 사물을 그 개념으로 보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나의 이성(理性)과 내 눈앞에 보이는 경계가
사사건건 반드시 충돌합니다.
가령, 죽을 뻔 하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사람이
“앞으로는 이 세상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보아야지!”
라고 맘을 먹었다 해도,
당장 악취 풍기는 시궁창을 보면
그 결심을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아름답다’는 개념과 시궁창이라는 경계가
서로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내면에 조성되어있는
‘아름다움’이라는 상(相)을 버리지 않고는,
단지 결심만으로는 눈에 보이는 경계를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심정적인 노력만 가지고는
내 안에 이미 자리잡은 무의식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수행하는 사람은
결국 이성을 넘어선 제 마음의 근원,
즉 자성(自性)을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부처’란 중생을 전제로 해서 만들어진 이름입니다.
마음에 중생이 있으므로 밖으로 또한 부처가 있습니다.
만약 마음 가운데 ‘중생’이라는 상(相)이 없다면
밖으로 부처 또한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때 비로소 온 우주가 부처 아님이 없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일체를 부처로 볼 수 있겠습니까? ‘
부처’라는 생각을 버리고 일체 상 없는 마음이 되어야
바로 눈앞에서 부처를 볼 것입니다.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금강경> 신문에서 옮김
이번달도 행복하세요.
#자유게시판










#금강경 #신문에서옮김
음력 23년11월01일 초하루 생각하는 글 옮김.
처처불상은 교리 4대표어의 맨 첫머리에 있는
원불교의 대표적인 가르침입니다.
이 중요한 가르침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공부1)
태조 이성계가 어느 날 무학대사에게 농(弄)을 걸었습니다.
“오늘 보니 대사는 짐의 눈에 살찐 돼지 같소이다.”
“소승의 눈에 대왕께서는 부처님 같습니다.”
“나는 대사를 돼지라고 하는데 왜 대사는 나에게 부처라 하시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이는 법이지요.”
대종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천지 만물 허공 법계가 다 부처 아님이 없나니,
우리는 어느 때 어느 곳이든지 항상 경외심을 놓지 말고
존엄하신 부처님을 대하는 청정한 마음과 경건한 태도로
천만 사물에 응할 것이며.” (교의품 4장)
이렇듯 우주만유가 다 법신불의
응화신(應化身: 세상에 몸을 나툰 것)이니,
일체가 부처 아님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대상을 참다운 부처님으로 대한다면,
우주만유와 내가 둘 아닌 몸,
상생(相生)의 관계로 되살아나서,
만나는 인연마다 행동 하나하나
끝없는 복으로 화하여 이 세상은 한없는 불토낙지(佛土樂地)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묻습니다.
“저도 마음으로는 모든 대상을 부처님으로 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 눈으로 보면 부처로 보이지가 않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공부2)
위 질문은 많은 이들의 공통된 의문입니다.
일체 모든 것이 부처라는 가르침을 믿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현실을 대하면 실제로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곧 마음에 상(相)을 가진 채로 보기 때문입니다.
부처로 보겠다는 것은 이른바 ‘부처’라고 하는 개념[相]을
미리 설정해놓고, 사물을 그 개념으로 보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나의 이성(理性)과 내 눈앞에 보이는 경계가
사사건건 반드시 충돌합니다.
가령, 죽을 뻔 하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사람이
“앞으로는 이 세상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보아야지!”
라고 맘을 먹었다 해도,
당장 악취 풍기는 시궁창을 보면
그 결심을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아름답다’는 개념과 시궁창이라는 경계가
서로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내면에 조성되어있는
‘아름다움’이라는 상(相)을 버리지 않고는,
단지 결심만으로는 눈에 보이는 경계를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심정적인 노력만 가지고는
내 안에 이미 자리잡은 무의식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수행하는 사람은
결국 이성을 넘어선 제 마음의 근원,
즉 자성(自性)을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부처’란 중생을 전제로 해서 만들어진 이름입니다.
마음에 중생이 있으므로 밖으로 또한 부처가 있습니다.
만약 마음 가운데 ‘중생’이라는 상(相)이 없다면
밖으로 부처 또한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때 비로소 온 우주가 부처 아님이 없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일체를 부처로 볼 수 있겠습니까? ‘
부처’라는 생각을 버리고 일체 상 없는 마음이 되어야
바로 눈앞에서 부처를 볼 것입니다.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금강경> 신문에서 옮김
이번달도 행복하세요.
#자유게시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