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무속나라 밴드 (2025-07-27)
성수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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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27 21:49
『성수청과 국무당 – 잊혀진 국가 제례의 집행자들』
― 민족종교 무교(巫敎)의 직능 유산을 찾아서
조선 시대, 왕실의 안위를 위해 존재하던 기관이 있었다.
그 이름은 ‘성수청(聖壽廳)’이다.
오늘날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기관은 조선 왕조에서 왕실의 장수를 기원하고, 궁중 제례를 주관하던 의례기관이었다.
‘성수(聖壽)’란 말 그대로 “거룩한 수명”, 곧 왕의 무병장수를 의미하며,
성수청은 이를 위해 각종 의례와 기도를 맡았던 실존 조직이다.
성수청의 중심에는 무당들이 있었다.
이들은 단순히 굿을 하는 이들이 아니라, 국가 차원의 제사를 집례하고 궁중 행사에 참여한 공식 제관(祭官)이었다.
고려 시대에는 ‘별기은(祈隱)’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했으며,
당시에도 기우제, 병제, 재액 해소 의식 등을 국가가 공식적으로 시행할 때 무당들이 동원되었다.
조선 초기에도 이 전통은 이어졌고, 무당들은 성수청 소속으로 왕실 행사에 참여했다.
이들은 흔히 ‘궁무당’ 또는 ‘국무당(國巫堂)’으로 불렸으며,
2012년 방영된 드라마 <해를 품은 달>에 등장하는 ‘액받이 무녀’와는 달리,
실제 역사 속의 무당들은 훨씬 더 공적이고 제도적인 구조 안에서 활동했다.
이들 중 일부는 신령과의 접신 능력, 예지력, 의례 진행 능력 등이 뛰어난 인물들이었고,
민간에서 영적 능력을 인정받아 궁으로 들어와 ‘수종 무당’으로 양성되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특별한 효험을 보였던 무당들은 사후에 ‘궁대신’으로 신격화되어 지방에 모셔졌고, 오늘날까지도 일부 지역에서는 ‘성수님’이라는 이름으로 인신(人神)처럼 모셔지기도 한다.
이는 성수청이라는 조직과, 그 안에서 활동하던 무당들의 위상과 영향력이 결코 민간의 주술사 수준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이들은 각자의 전문 기능에 따라 다양하게 활동했다.
예를 들어, 병을 치유하고 부적을 쓰는 무당은 ‘치유형 무당(巫醫)’으로,
귀신을 퇴치하고 액운을 막는 무당은 ‘비방형 무당’,
춤과 소리로 신을 맞이하며 제례에 참여한 무당은 ‘무예형 무당’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은 오늘날의 무속인과 달리, 단일한 기능에 머물지 않고 치유자, 예언자, 제관, 영매자, 예능인의 역할을 모두 수행했다.
그러나 이처럼 제도권 안에서 활동하던 성수청과 국무당 체계는 조선 중기 이후 급격히 약화되었다.
성리학을 중심으로 한 유교적 통치 이념이 강화되면서,
무속은 ‘미신’으로 간주되었고, 무당들은 점차 공적 제의에서 배제되기 시작했다.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사림파의 개혁은 이러한 흐름에 정점을 찍었고,
결국 성수청은 폐지되고 무당들은 궁 밖으로 쫓겨나 민간에서 활동하는 ‘떠돌이 무당’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산신제, 고사, 혼례, 상례, 재액굿 등 민간에서 필요한 의례와 굿은 여전히 무당들의 손을 통해 이어졌다.
특히, 치유형 무당들은 무의(巫醫)로서 약초와 기도, 민간요법을 병행하며 환자를 돌보았고, 일부는 한의사나 의녀와 협업하기도 했다.
이 무렵 무당들은 무업세(巫業稅)라는 세금도 국가에 납부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세금은 신분과 기능에 따라 다르게 책정되었는데,
국무당은 9근, 일반 무당은 1근, 신당을 지키는 무당은 2근 등으로 부과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는 무업이 단순한 미신이 아니라, 경제적 단위이자 사회적 인정 대상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비록 지금은 성수청이라는 기관도, 국무당이라는 명칭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정신은 여전히 살아 있다.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이 굿을 찾고, 고사를 지내며, 신령의 뜻을 묻는다.
이는 무속이 아직도 한국인의 삶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는 증거이며,
이 신앙이 단순한 민간풍속이 아니라 수천 년을 이어온 민족종교로서의 정체성을 가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일본의 신토(神道)가 국가종교로 자리 잡은 것은, 그들이 외래종교에 휘둘리지 않고 고유의 신앙을 지켜냈기 때문이다.
우리 또한 무속을 넘어, 무교(巫敎)라는 본래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그 첫걸음은 성수청과 국무당의 실체를 바로 알고, 그 전통과 직능을 다시 회복하려는 노력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
성수청 대표 전이표 씀.
#무속칼럼

― 민족종교 무교(巫敎)의 직능 유산을 찾아서
조선 시대, 왕실의 안위를 위해 존재하던 기관이 있었다.
그 이름은 ‘성수청(聖壽廳)’이다.
오늘날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기관은 조선 왕조에서 왕실의 장수를 기원하고, 궁중 제례를 주관하던 의례기관이었다.
‘성수(聖壽)’란 말 그대로 “거룩한 수명”, 곧 왕의 무병장수를 의미하며,
성수청은 이를 위해 각종 의례와 기도를 맡았던 실존 조직이다.
성수청의 중심에는 무당들이 있었다.
이들은 단순히 굿을 하는 이들이 아니라, 국가 차원의 제사를 집례하고 궁중 행사에 참여한 공식 제관(祭官)이었다.
고려 시대에는 ‘별기은(祈隱)’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했으며,
당시에도 기우제, 병제, 재액 해소 의식 등을 국가가 공식적으로 시행할 때 무당들이 동원되었다.
조선 초기에도 이 전통은 이어졌고, 무당들은 성수청 소속으로 왕실 행사에 참여했다.
이들은 흔히 ‘궁무당’ 또는 ‘국무당(國巫堂)’으로 불렸으며,
2012년 방영된 드라마 <해를 품은 달>에 등장하는 ‘액받이 무녀’와는 달리,
실제 역사 속의 무당들은 훨씬 더 공적이고 제도적인 구조 안에서 활동했다.
이들 중 일부는 신령과의 접신 능력, 예지력, 의례 진행 능력 등이 뛰어난 인물들이었고,
민간에서 영적 능력을 인정받아 궁으로 들어와 ‘수종 무당’으로 양성되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특별한 효험을 보였던 무당들은 사후에 ‘궁대신’으로 신격화되어 지방에 모셔졌고, 오늘날까지도 일부 지역에서는 ‘성수님’이라는 이름으로 인신(人神)처럼 모셔지기도 한다.
이는 성수청이라는 조직과, 그 안에서 활동하던 무당들의 위상과 영향력이 결코 민간의 주술사 수준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이들은 각자의 전문 기능에 따라 다양하게 활동했다.
예를 들어, 병을 치유하고 부적을 쓰는 무당은 ‘치유형 무당(巫醫)’으로,
귀신을 퇴치하고 액운을 막는 무당은 ‘비방형 무당’,
춤과 소리로 신을 맞이하며 제례에 참여한 무당은 ‘무예형 무당’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은 오늘날의 무속인과 달리, 단일한 기능에 머물지 않고 치유자, 예언자, 제관, 영매자, 예능인의 역할을 모두 수행했다.
그러나 이처럼 제도권 안에서 활동하던 성수청과 국무당 체계는 조선 중기 이후 급격히 약화되었다.
성리학을 중심으로 한 유교적 통치 이념이 강화되면서,
무속은 ‘미신’으로 간주되었고, 무당들은 점차 공적 제의에서 배제되기 시작했다.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사림파의 개혁은 이러한 흐름에 정점을 찍었고,
결국 성수청은 폐지되고 무당들은 궁 밖으로 쫓겨나 민간에서 활동하는 ‘떠돌이 무당’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산신제, 고사, 혼례, 상례, 재액굿 등 민간에서 필요한 의례와 굿은 여전히 무당들의 손을 통해 이어졌다.
특히, 치유형 무당들은 무의(巫醫)로서 약초와 기도, 민간요법을 병행하며 환자를 돌보았고, 일부는 한의사나 의녀와 협업하기도 했다.
이 무렵 무당들은 무업세(巫業稅)라는 세금도 국가에 납부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세금은 신분과 기능에 따라 다르게 책정되었는데,
국무당은 9근, 일반 무당은 1근, 신당을 지키는 무당은 2근 등으로 부과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는 무업이 단순한 미신이 아니라, 경제적 단위이자 사회적 인정 대상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비록 지금은 성수청이라는 기관도, 국무당이라는 명칭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정신은 여전히 살아 있다.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이 굿을 찾고, 고사를 지내며, 신령의 뜻을 묻는다.
이는 무속이 아직도 한국인의 삶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는 증거이며,
이 신앙이 단순한 민간풍속이 아니라 수천 년을 이어온 민족종교로서의 정체성을 가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일본의 신토(神道)가 국가종교로 자리 잡은 것은, 그들이 외래종교에 휘둘리지 않고 고유의 신앙을 지켜냈기 때문이다.
우리 또한 무속을 넘어, 무교(巫敎)라는 본래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그 첫걸음은 성수청과 국무당의 실체를 바로 알고, 그 전통과 직능을 다시 회복하려는 노력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
성수청 대표 전이표 씀.
#무속칼럼

